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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병 개인전 '채움 비움'

기간
2019-08-07 ~ 2019-08-13
장소
G&J 광주전남 갤러리
티켓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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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병의 조각
빛이 열어놓은 내면풍경
혹은 추상풍경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미술사를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단어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재현을 들 수가 있다. 미술사적 용어로는 구상과 형상미술이 여기에 해당한다. 어쩜 미술사 전체는 이런 재현의 역사에 다름 아니었다. 조각 역시 마찬가지. 이런 재현의 역사로부터 결별한 것이 모더니즘 패러다임이고 모더니즘 조각이다. 회화로 치자면 점 선 면 색채와 같은, 그리고 조각의 경우에는 형태와 구조, 양감과 질감 그리고 물성과 같은 형식요소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회화가 성립하는 근거나 조각이 가능해지는 지점은 내용이 아니라 혹은 내용이라기보다는 이런 형식적 성질에 의해서이다. 조각으로 치자면 형태와 구조, 양감과 질감 그리고 물성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조각이라고 본 것이다. 모더니즘 조각은 바로 이처럼 조각의 본질 내지 본성이라고 부를 만한 형식적 성질 내지 형식요소에 주목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예외가 없지 않지만, 그러므로 어쩜 모더니즘 이후 조각은 이런 조각의 본질에 대한 정의와 재정의 그리고 해석의 역사로 볼 수 있겠고, 그 해석 여부를 반영하고 확장한, 심화하고 변주해온 현재진행형의 역사로 볼 수가 있겠다.

세대로 보나 성향으로 보아 작가 공병은 이런 모더니즘 조각의 강령으로 견인되는 경우로 보인다. 가급적 형상을 최소화하면서 나무면 나무, 돌이면 돌, 철이면 철 고유의 물성이 부각되게 만든다. 여기에 형상마저도 어떤 내용을 전제하기보다는 소재 자체가 암시하는 형상, 반쯤은 타고난 형상이 저절로 길을 찾아가도록 길을 터주는 태도를 취한다. 조형적 개입을 최소화함으로써 자연 소재 고유의 본성이 부각되게 만든다. 그리고 여기에 작가는 일종의 관계의 미학을 도입한다. 나무와 돌과 철을 하나로 조형한 것이며, 상호간 이질적인 재료와 재료가 하나로 만나지게 한 것이다. 이로써 의외의 조합과 함께 예기치 못한 조화를 통해 조형이 주는 감각적 쾌감의 수위를 확장 심화시켜놓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작가는 기성품의 도입에도 주저함이 없다. 식칼과 무쇠 솥과 같은 생활 오브제들이 자연 소재와 어우러지는 것인데, 처음부터 그런 형상이, 그런 조합이, 그런 조화가 있었던 양 친근하고 자연스럽다(개념적인 그리고 무미건조한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와는 그 결이 사뭇 혹은 많이 다른). 근작의 경우에는 소 쟁기와 가래를 도입한 설치작업이 있는데, 생활 오브제의 도입이 별도의 설치작업으로까지 확대 재생산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어느 경우이건 평소 차이와 관계의 미학에 대한 이해와 함께(관계에 대한 인식은 차이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하는 것인 만큼, 그 둘은 서로 통한다), 재료의 물성과 본성을 읽어내는 감각적 혜안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작가는 심지어 생활 오브제마저 자연(제 2의 자연?)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조각은 자연의 본성에 충실한 조각, 자연에 흡사한 조각이 된다. 자연과 조각 사이에 위치하는(일상과 조각 사이에 위치하는 미니멀리즘과는 그 결이 사뭇 혹은 많이 다른) 조각이 된다.

그렇게 작가는 조각의 본성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모더니스트이고, 인공의 손길을 최소화함으로써 자연의 본성이 드러나게 돕는다는 면에선 자연주의자이다. 모더니스트와 자연주의자, 자연주의적 모더니스트, 작가의 작가적 아이덴티티를 형성시켜준 조형형질 내지 유전자로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작가는 근작에서 주목할 만한 자기변신을 꾀한다. 나무와 돌과 철 대신 아크릴을 소재로 취한 것이다. 단순히 소재가 변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여기에는 단순한 소재 변화 이상의 괄목할 만한 차이(그리고 이를 통한 자기 확장성)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나무와 돌과 철은 자연소재이고 반쯤 자연소재이다. 이에 반해 아크릴은 인공적인 소재다. 도시적인 소재며, 현대적인 소재다. 소재 변화는 단순한 소재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소재가 변하면 감수성이 변하고 감각이 바뀐다(혹은 변화된 감수성과 감각이 요구된다). 하나가 변하면 다 변한다. 이로써 섣불리 자연으로부터 인공 쪽으로 턴한 것으로 단정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이를 계기로 작가의 작업이 전기를 맞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아크릴은 투명성과 투과성, 반영성과 왜곡성이 특징(그리고 본성)이다. 선입견으로 굳어진 눈에 들어오는 사이즈가 아니라면, 있는지 없는지조차 불분명해진다(존재의 불투명성). 여기에 작가의 작업에서처럼 일정하거나 상당한 두께를 가지고 있는 경우라면 마치 조형이 투명한 덩어리 속에 들어있는 것 같은, 좀 극화해 말하자면 허공에 떠 있거나 던져진 것 같은 착각(착시)을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있음과 없음의 경계가 불분명해진 탓에 마치 홀로그램에서처럼 손으로 덩어리 속 조형을 만지거나 붙잡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게다가 그 조형은 미세하지만 움직이기조차 한다(옵티컬 효과?). 사실을 말하자면 조형 자체가 움직이는 건 아니지만,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그렇게 느낀다). 마치 관객의 시점에 반응하기라도 하듯 매번 다르게 보이는 것이며(특히 그러데이션 효과?), 때에 따라선 굴절(왜곡)돼 보이기조차 한다. 여기에 투명한 덩어리(차라리 표면)는 외부환경을 반영하기도 한다. 때로 작가는 아크릴과 함께 거울을 도입해 이런 반영적인 설질을 강조하고 극화하기도 한다. 그리고 아크릴 조형물은 그림자를 만든다. 조형과 그림자, 실재와 그림자, 실상과 허상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조형의 가시영역을 확장시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며 시지각 효과는 왜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리고 그 현상이며 효과는 언제 어떻게 극대화될 수가 있는가. 그건 어쩜 투명한 아크릴 덩어리 소재 고유의 성질에 부합하는 일이 될 것이고, 그 본성이 자기를 실현하도록 돕는 일이 될 것이고, 그 자체가 작가 고유의 조형적 성과가 될 것이다. 그게 뭔가. 빛이다. 투명도, 투과도, 반영도, 왜곡도, 그리고 조형과 그림자, 실재와 그림자, 그러므로 궁극에는 실상과 허상과의 경계가 모호해지거나 아예 사라지는 것이 모두 빛에 의해서이다. 빛이 투명한 아크릴 덩어리를 통과하면서 일어나는 일이고, 그 표면에서 일어나는 유희(감각적 유희?)다. 그러면 그 빛을 어떻게 붙잡고 표현할 것인가. 그 빛은 어떻게 실감될 수가 있는가. 바로 빛살을 조형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그래서 작가는 빛살을 조형한다. 어쩜 빛의 물리적 형상(그리고 현상)을 빛살로 본 것이다.

그렇게 작가가 개발한 도구(일종의 조각도)로 빛살을 음각하는데, 표면(전면)에서 보면 돋을새김 한 양각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렇게 조각한 아크릴 판 두 개(때로 두 개 이상)를 붙여 하나로 만드는데, 마치 조형이 투명한 덩어리 속에 갇힌 것 같은, 좀 극화해 말하자면 마치 허공에 조각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렇게 작가는 대개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형태를 조형한다. 아무래도 빛 자체가 관념적 형상에 가깝고(빛의 존재 방식은 좀 특이한데, 감각적 대상이면서 마치 감각을 초월한 대상처럼 보인다), 이런 관념적 대상을 형상으로 옮기기에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형태가 어울린다고 본 것이다. 게다가 전통미학에서 기하학적 형태는 수학으로 간주되었고, 여기에 관념적 대상의 표상으로 여겨졌다(예컨대 신성기하학). 그렇게 작가는 격자패턴의 무늬를 비롯한 이러저런 기하학적 형태를 조형하는데, 특히 원 형상을 조형할 때 빛의 물리적 현상이며 표상형식이 극대화된다. 대개는 중심성이 강한 구도(아님 구조?)와 함께, 원을 그리면서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빛살 현상을 표현해놓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색채를 도입해 조형에 변화를 꾀한다. 미묘한 빛살과 부분적으로 도입한 현란한 원색과의 대비가 관념과 물질, 질료적 대상과 관념적 대상이 하나로 합체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아마도 빛의 관념적 대상을 감각적이고 질료적인 대상으로 옮겨(혹은 해석해) 그 실체를 실감할 수 있도록 한 것일 터이다(어쩜 색 자체가 이미 빛의 물리적 현상 혹은 실체일 수 있다). 여기에 작가의 조각은 평면과 입체,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그 둘이 하나로 합치되는 제3의 조형 가능성을 예시해주고 있는 점도 주목해볼 일이다. 그런가하면 앞서 작가의 조각의 특징은 관계의 미학 곧 상호간 이질적인 재료들을 하나의 조형으로 합치해놓고 있는 것에서 찾아질 수 있다고 했는데, 이런 특징은 근작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자연목이나 철물 그리고 고가구와 같은 자연소재로 좌대를 대체하거나, 때로 석재로 프레임을 대신한 것이다. 아크릴 조형으로 나타난 인공물이 좌대를 대신한 자연물과 어우러지는, 그렇게 인공과 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한편, 과거와 현대가 하나로 얽히는 시간여행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일종의 내면풍경 혹은 추상풍경을 열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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