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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 이 달의 작가

그림을 그만 둘까 생각하다가도 그림 때문에 다시 일어나곤 하죠

고선주 광남일보 문화특집부장(시인·월간 ‘전라도인’ 편집장)
부제
전남 담양에 머물며 작업 매진 서양화가

2014년 수북면 정중리에 작업실 마련 농사 일과 창작 병행
‘꽃과 여인’ 주제로 인물 작업 집중·아날로그적 감성 투영
"진솔한 삶을 산 화가로 평가를"…내년 12회 개인전 계획

그림을 그만 둘까 생각하다가도 그림 때문에 다시 일어나곤 하죠-대표 이미지
작업실

그의 화실은 두번째 방문이다. 지금으로부터 3년여전인 2016년 12월 방문한 바 있다. 그의 화실은 남도서정이 물씬 풍기는 농촌에 자리하고 있다. 수확 막바지에 접어든 농촌 풍경은 한산하다. 들판은 텅빈 채 겨우살이 준비가 한창이다.

그래서 허전하기보다는 오히려 정겹다. 들판을 뱀처럼 기어가는 길들이 지그재그 마을로 흘러든다. 저 멀리 병풍산이 마치 이 마을의 병풍이라도 되는 듯 뒤따라온다. 농촌에 사는 사람들은 말로 못할 저마다의 고통이 있겠지만 나들이하는 심정으로 방문하는 사람에게는 운치 그 자체다. 조금 미안한 마음으로 작업실을 찾았다. 전남 담양군 수북면 정중리 751번지(정중길 68의 7)에 한 화가가 작업을 하며 텃밭을 일구고 살아간다. 서양화가 고윤숙씨(68)의 이야기로, 5년차 농촌 살이를 살아내고 있다. 화가이자 농부의 삶인 셈이다.

마침 주차를 하고 골목길로 들어서자 그의 거처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의 거처는 안방과 거실, 테라스, 미니갤러리, 그림창고, 텃밭 등 단출하게 이뤄져 있다. 작가는 이미 대문 옆에서 농부로서의 삶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수많은 전시가 열리고 사라져 갔지만 그와 미술현장에서 마주칠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간이 문제였다.

광주전남여성작가회(회장 노정숙)의 서른여섯번째 정기전(9.26∼10.09 광주시립미술관 금남로분관) 때 뵐 수 있었으나 필자가 시간을 낼 수 없어 전시장을 찾지 못하면서 그나마 뵐 수 있었던 기회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이 정기전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자리였다. 후배작가들이 원로작가들의 고마움과 흔적을 담아내기 위해 아카이브 전시방식을 도입, 36년간 함께해온 원로여성작가들의 예술과 삶을 들어볼 수 있어서다. 고 작가도 자신의 삶과 회화를 들려주는 등 뜻깊은 자리였다는 회고다.

꽃에 취하다

이는 최근 그가 미술현장에서 선보인 족적이다. 그는 담양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수시로 일 있을 때마다 광주로 출타한다. 필자가 방문하는 날 역시 오후에 광주 출타가 잡혀져 있었다. 그만큼 그는 광주권을 연고로 활동을 펼쳐왔다.

그러다 2014년 현재의 자리로 거처를 옮기면서 본격적인 농촌 생활이 시작됐다. 그의 시간들은 모두 그림과 텃밭 농사로 압축되고 있다. 그림도, 농사도 모두 어그러질까 걱정이 돼 그는 화가와 농부의 시간을 분리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2시간 동안 텃밭을 일군 뒤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작업에 몰두한다. 아침 시간에 농사 일을 하는데는 선선하기도 하고, 작업에 들어가기 전 워밍업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3년여전 방문했을 때 텃밭은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이번 방문에서는 훨씬 더 텃밭이 자리잡은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가 온 정성을 들여 키운 배추와 양파, 마늘 등이 매년 텃밭을 푸르게 수놓는다. 이것만 보더라도 그가 텃밭 가꾸기에 신경을 많이 쓴듯 했다.

그는 화가로서의 삶과 농부로서의 삶 모두 최선을 다해 살아내고 있다는 설명이 부합되지 않을까 싶다. 또 농촌에 안착할 때 주민들과의 동화가 중요하지만 3년여전보다 주민들과 더 친밀하게 지내게 됐다고 한다. 어느덧 3년 사이 마을과의 동화가 깊어진 듯 보였다.

만나자 마자 시골살이의 어려움을 내비친다 "그림은 안 그리고 농부 했어요"라고. 이는 갈수록 작업하는데 집중하기 어렵다는 반어로 이해됐다. 전시가 잡힌다거나 해야 작업이 더 집중된다는 말을 우회적으로 한 것이다. 굳이 농촌 생활이라는 게 5대5식으로 나눠 생활할 수는 없을 터다. 수확철이냐, 아니냐에 따라 농사 일은 더 늘기도, 줄기도 한다. 그림과 농사를 넘나들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가 화가라는 사실 말이다.

사랑 듬뿍

그는 그동안 3년여 사이 제10회 개인전과 프랑스 파리 초대전(4인전)을 연데 이어 제11회 개인전(6.18∼7.11 U갤러리)을 열 만큼 분주한 시간들을 보냈다. 농사 일을 제 아무리 열심히 했다손 치더라도 화가로서의 삶을 능가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이런 분주한 일상 속 그는 인물 작업에 소홀히 하지 않고 있다.

"인물 작업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제 주위에 보이는 것들을 화폭에 반영하는데 ‘꽃과 여인’이 주제가 되고 있어요. ‘그림 속 인물이 누구냐’고 묻는데 사실은 제 며느리죠. 며느리로 모델을 애용하는데 젊은 날의 제 모습이 투영되는 것 같기도 해요. 사랑스럽고, 정겨워 제가 보상받는 느낌까지 들더군요."

분명 주변에서 농사 일이 만만치 않아 작업에 어려움을 겪지 않을까라고 하는 시각이 있는데 ‘일이 목적이 아니라 그림이 주’라고 강조한다. 작업이 막힐 때마다 일을 하는 것이니까 ‘그림을 그리기 위한 방편이 농사’라고 선을 긋는다. 다만 그림만 홀로 고립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하나되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작가는 젊었을 때 풍경을 고수했다. 그러다 정물에 한 5년 빠져 지냈다. 지금은 인물 작업에 매달린다.

"소재만 달라졌을 뿐 자연을 그리는 것은 같은 맥락이라고 봅니다. 생각이 풀리지 않을 때는 한달이고, 두달이고 간에 작업을 하지 않죠. 이렇게 하면 그 시간이 지난 다음 자연스럽게 생각이 풀리더군요. 조금 풀리는 게 오래 걸려도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그는 3년여전 인터뷰에서 ‘그림은 친구이자 동반자, 그리고 애인’이다. 때로는 ‘왜 그림을 시작했을까 원수같기도 하다’고 밝힌 바 있다. 이 행간에서 그가 생각하는 그림을 규정할 수 있다.

작남인도 여인

그가 시골에 안착했다고 바깥의 세상을 보는 것을 게을리 하지는 않는다. 젊은 날부터 그는 여행을 즐겨 했다. 그저 노는 게 좋았던 것이 아니라 스케치를 겸한 여정이었다. 창작 에너지를 채워넣기 위한 자신만의 방식이었다. 그는 늘 시골에 뿌리내리고 살면서도 정기적으로 떠날 준비를 하는 듯 보인다. 그는 인도와 스리랑카, 몰디브, 태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40여개국을 다녀왔다. 파리 같은 곳에서는 전시를 열면서 한달간 체류, 여행을 가미했다. 여행은 그가 떠나는 것이지만 이는 후에 그림을 더 애착있게 자신 안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농촌 작업실로 옮겨와서 그는 농사 일만 얻은 것은 아니다. 그림 외에도 바느질(규방공예)과 도자기를 배웠다. 조각보 등은 광주 대인시장에 판매할 정도로 솜씨가 좋다고 한다.

이처럼 그는 늘 시간이 부족하다. 주변 동년배 지인들은 시간을 쪼개 천천히 흘러 보내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하는 일들이 넘쳐 시간이 늘 모자라 분주하다는 전언이다.

그는 분주해도 작업만큼은 근성있게 임한다. 내년 가을께 제12회 개인전을 앞두고 또 작업에 매진할 각오다.

무념

최근 그는 나이를 먹어가는 것에 대해 감사해 한다. 눈앞에 펼쳐진 물상들을 허투루 보아 넘기지 않기 때문이다. 깊이있게 관망하고, 그 의미를 조곤조곤 따져보게 돼 감사하다는 것이다. 젊었을 때 그렇게까지 깊이있게 바라보지 않는 것들을 요새 그는 예사롭지 않게 바라본다.

"젊었을 때는 겉모습을 바라봤죠. 그래서 요즘 나이 먹는 것에 대해 아픈 것 빼고는 감사하죠. 사물들을 깊이있게 바라보니까요, 젊었을 때 모든 물상들의 본질을 깊이있게 바라보는 깨달음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젊었을 때 제 그림에 대해 지지해주는 사람은 없었어요, 단지 그림이 좋아서 그렸습니다. 그림을 그만 둘까 생각하다가도 그림 때문에 다시 일어나곤 하죠."

그는 현시대 트렌드에 민감하기 보다는 조금 편안한 회화에 천착할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어떤 화가로 평가를 받고 싶냐’고 묻자 아날로그적 감성이 투영된 작업을 하는 작가라고 밝혔다.

"저는 특별한 화가가 되기보다는 진솔한 삶을 산 화가로 평가받기를 바라죠. 제가 사랑으로 그림을 그렸듯, 그림을 보는 사람도 사랑으로 봐주면 좋겠습니다. 사상이나 의미를 크게 의식하지 않고 말이죠. 붓과 오일 컬러 등 기본적 재료로 그린, 편안한 작품이 좋은 것 같아요. 디지털보다 아날로그 감성이 투영된 것 말이죠. 조금 올드하고 새로운 것 없어도 고수해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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