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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 이 달의 작가

솟대 전승 앞장 조각가 윤정귀

고선주 광남일보 문화특집부장·월간 전라도인 편집장
부제
다양한 재료 통해 실생활 연계된 솟대 작품 만들고 싶습니다

20년째 솟대 작업 매진…함평 해보에 작업실 두고 활동 주력
팽목항·도라산역·일본 무궁화동산 등에 작품설치 공감 확장
"유일한 사람보다 꾸준하게 작업하는 사람 됐으면 하는 바람"

솟대 전승 앞장 조각가 윤정귀-대표 이미지
작업실에서 작업중인 윤작가

그는 5·18광주민중항쟁 때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검문을 받고 난뒤 돌아가다가 뒤에서 계엄군이 쏜 총탄 세발을 맞고 쓰러졌다. 그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기억된 5·18은 그저 역사서에서나 볼 수 있는 기록이 아니라 현실 속 기록 그 자체다. 이런 아픔을 깊이 간직한 채 살아가는 그는 그 이후 절치부심 학업에 매진해 전남대 사범대학 미술교육과에 입학해 조각을 전공했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1988년 교직에 진출한 그는 후학을 양성하며 조각 작업을 펼치는데 집중했다.

중간에 상경해 그곳에서 교직 생활을 10년여 한 뒤 1999년 다시 광주로 내려왔다. 그러다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숲과 솟대나 장승같은 전통민속의 조형물이었다. 나름 공부하고 연구 과정을 거친 뒤 솟대에 입문했다. 숲 공부를 위해 남부대에 진학해 공부를 했을 만큼 학구적 열정을 발휘하기도 했다.

전남 화순 도곡에 작업실을 내고 솟대 작업의 기초를 다졌다. 화순은 물론 장성과 담양을 돌며 10여년을 보낸 뒤 7년 전 함평 해보에 작업실을 마련,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주인공은 솟대 조각의 전승에 앞장서고 있는 윤정귀(56·전남 진도 군내중 미술교사)씨. 그가 집중하고 있는 솟대는 희망과 소망, 기원의 의미가 담긴 조형물로 장대나 돌기둥 위에 새를 앉힌 형태다. 시골마을을 이동하다 우연하게 한두번쯤 접했을 것이다. 이 솟대는 청동기 시대부터 내려온 아름다운 전통미술로, 풍요를 기원하거나 과거 급제 기념 및 제액초복(액막이)을 목적으로 세운다. 솟대는 솔대나 짐대(진또배기), 화주대, 소주대, 거릿대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가장 널리 알려지고 보편화된 명칭이 ‘솟대’인 것이다.

작품 1

그의 작업실은 함평군 해보면 상곡리 59-1 상모마을(해보면 상모길 35)에 자리하고 있다. 방문하기로 한날은 광주 증심사 자락에서 출발해야 해서 28㎞를 이동해야 했다. 멀지 않는 곳이지만 시내를 가로질러 빠져나가야 해서 마음이 다소 급해졌다. 시내에서 시간을 다 버려야 했다. 내비게이션이 완벽하게 안내해주면 좋으련만 버전이 오래된 내비게이션이어서 작업실 근처까지만 안내하고 멈춰버려 찾는데 애를 먹어야 했다.

결국 윤 작가가 데리러 나와야 했다. 그를 따라 시골집 마당으로 들어가니 마당 끝자락 경계에 솟대가 줄지어 서 있었다. 석양무렵으로 나름 운치가 있었다. 작가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이곳 작업실에 머물며 작업에 매진한다. 나머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근무처가 있는 전남 진도에 머문다. 그가 머무는 상모마을 일대는 파평 윤씨 후예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다. 무연고인 함평에 작업실을 마련한 것도 그가 파평 윤씨인데다 집성촌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실은 근사한 집이 아니다. 오래된 시골집이다. 두채의 가옥 모두 임대해 사용하고 있다. 그의 작업실에 들기 전 이 집을 지키는, 수호신과 같은 개(犬)가 사람의 방문이 반가웠던지 계속 꼬리를 흔들며 반겨준다.

작품2

그의 작업실에 들어서자 그동안 작업을 해 완성한 각양각색의 솟대들이 진열돼 있고, 작업에 필요한 재료와 공구들이 놓여져 있었다. 평면회화 위주로 활동하는 화가의 작업실과는 사뭇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누가 봐도 첫눈에 솟대를 하는 작가의 작업실이라는 것을 금방 눈치챌 수 있을 정도다.

처음에 그는 조각 중심의 조형작업만 하다가 솟대를 재미삼아 시작했다. 그러다 솟대와 조형을 결합시켜 나갔다. 솟대를 위해 강원도에서 제주도까지 누비기도 했다. 솟대를 만드는 사람들과 함께 대한민국 솟대작가협회를 2011년 결성하고 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서 창립전을 열었다. 흩어져 있을 뿐 하나로 규합하기 힘들었던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솟대 조직체가 등장한 것이다. 작가의 솟대는 깊이가 있다. 민속학을 공부하고 연구한 것이 뒷받침하고 있어서다.

"그전에 보면 솟대는 보통 피상적으로만 하거나 손재주로만 하는 사람이 대다수였죠. 저는 민속학을 공부한데다 시골에서 솟대 작업을 하는 어르신들을 많이 만났어요. 자료를 수집하고 기록을 하는 등 이런 과정들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했습니다. 사람들은 솟대가 야외에만 있는 것으로 알지만 저는 실내로 끌어들여 지금보다 더 확산시키려 노력을 하고 있어요."

이런 노력의 이면에는 스토리가 있는 솟대 작업을 하고 싶은 개인적 열망이 있어서다. 솟대를 이단이나 우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장승은 절에 경계 표시를 하는 것이었다면, 솟대는 역사가 오래 됐고, 민속과 관련된 조형미술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솟대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2000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밝힌다. 예전 서울대 합격이나 사법고시 합격이라는 플래카드가 매달리는 시절이 있었는데 이런 게 솟대와 같은 역할이라고.

작품6

그는 오늘날 솟대는 장식용과 야외용, 축하용, 볼펜꽂이용, 명함꽂이용 등 그 쓰임새가 무궁무진하지만 솟대를 하나의 상업행위로 한정하지 않는다. 솟대의 판매보다는 홍보에 집중하고 있어서다. 그래서 공익적 솟대의 소통에 게을리하지 않는다. 개인전을 두 차례 열었을 뿐 더이상 개인전을 생각하지 않는다. 주변에 부담을 주는 등 민폐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건 이후인 2014년 11월 팽목항 방파제에 솟대 5개를 세워 희생된 영혼들을 달래는데 앞장섰으며,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도라산역을 방문했을 당시 통일기원 솟대를 세웠다. 2016년 러시아 바이칼호에는 20여점의 솟대를 세운데 이어 2017년 7월에는 일본 무궁화공원에 재능기부를 통해 솟대를 세웠다.

특히 그의 솟대는 나무나 금속으로만 온전한 작품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앞서 밝힌 것처럼 그는 조각 전공자로 조각 작업이 가능하다. 그래서 그의 솟대 작품은 대개 소년이나 소녀 조각상이 합쳐져 한 작품을 이루고 있다. 이는 조형적 접근이 가능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그의 솟대 작품에는 이야기가 있는 풍경을 지향한다. 아울러 공간감각 또한 그가 가지고 있는 강점으로 읽힌다. 디자인 특허까지 취득했다.

작품4

진도(학교)와 함평(작업실), 곡성 옥과(농장) 등을 오가며 분주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그는 앞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솟대 작업에 나설 계획이다.

"전통 솟대의 자료를 연구하고 보존하는 등 아카이브 구축에 온힘을 쏟을 각오입니다. 재료의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등 새로운 솟대를 만들까 해요. ‘목·금·토’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나무 솟대 작업을 해왔고, 금속(동) 솟대 작업을 해온 만큼 석(石) 작업을 해보고 싶죠. 다양한 재료를 통해 실생활과 연계된 솟대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솟대 분야에서 유일한 사람보다는 꾸준하게 작업하는 사람으로 기록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는 2022년 2월 명예퇴직을 신청할 생각이다. 작품활동을 하면서 사진과 여행, 등산 등 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는 판단 때문이다. 교직을 나오면 전국에 퍼져 있는 솟대 작가들과 만나 정보교류를 하고, 친목을 도모하면서 지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다 2020년에는 대한민국 솟대작가협회 회장 직분을 맡아 더욱 분주한 일상이 전개될 것이라고 들려줬다.

그의 일상은 모두 솟대가 점령하고 있다. 솟대의 아카이브 구축에 진력하는 동시에 최고 반열에 오른 장인이 돼 가고 있는 듯한 형국이다. 그가 향후 어떤 작업과 작품 행보를 보일 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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