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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 이 달의 작가

정물화의 유혹 무안 오승우미술관 기획전

조인호 (광주미술문화연구소 대표)
부제

2019.12.18까지 6개 소주제에 19작가 작품전시

정운학.기록된 풍경-정물.2019.LED,필름,에폭시.35x50x9c

정물화의 유혹 무안 오승우미술관 기획전-대표 이미지
구자승.회고.2017.100x100cm).캔버스에유화

"정물을 선택하고 페인팅하는 과정은 마치 주변에 부유하고 있는 수많은 언어들 중에서 몇 개를 선택하여 하나의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하면 화가가 그린 정물은 은유나 환유의 비유처럼 하나의 수사이며 이로써 수많은 의미의 계열을 함축하고 있는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무안군립오승우미술관 박현화 관장이 '정물화의 유혹' 전시(2019.09.28.-12.18)를 기획하면서 붙인 글의 일부이다.

정물화는 학창시절 미술시간이나 그림에 입문하는 초기에 주로 많이 다루어지던 소재다. 풍경이나 인물에 비하면 정지되어 있는 상태여서 아무 때고 긴 시간동안 붙들고 있어도 무방하고 넓은 시야도 필요 없이 일정 범위만을 집중해서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급 완상용이거나 생명이 없는 기물과 생활주변 소품, 실내로 옮겨 온 자연 생명체의 일부가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그래서 대개는 초보단계, 아니면 별로 변화나 감흥이 적은 그림쯤으로 여긴다. 그러면서도 고대 로마벽화나 17세기 유럽의 바로크 회화와 세잔의 사과를 비롯, 조선의 책가도와 김환기의 현대 추상회화, 이이남의 미디어아트 등과 같이 그야말로 동서고금을 넘나들며 오랜 기간 미술의 역사와 함께 해 온 회화세계이기도 하다

구성연.Sugar 07(부분).2015.라이트젯C프린트.각225x150cm

‘정물화의 유혹’ 전시는 그런 정물화에 대한 편견을 새삼 재환기시켜 준다. 고전적 정물화부터 설치와 영상, 색다른 매체 확장까지 19명의 작품들을 ‘빛, 균제, 세계의 질서’ ‘죽음과 소멸’ ‘사랑과 욕망’ ‘시간과 공간-기억’ ‘실존과 현상, 초현실’ ‘일상의 기호, 서사’ 등 6개의 소주제로 엮어 '정물'의 의미와 표현들을 보다 다각적으로 펼쳐놓았다. 정지 상태인 그들을 객관 사물로 바라보는 일방적 관계 그대로 가감 없이 재현되기도 하지만, 기억과 상상과 몽환이 녹아들어 살짝 모습을 바꾸거나 다른 공간 다른 형상으로 재구성되기도 하였다. 일정한 상태로 파인더 안에 포착되거나 의도된 구성으로 재조합된 사물들의 관찰과 해석에서 질서·실존·생사·욕망·일상·서사 등이 읽혀지기도 하고, 그런 실재와 비현실의 경계 사이에서 무수한 형상들이 빚어진 것이다.

전강옥.기울어진테이블.2011.철,합성수지.우레탄도색.118x131x43cm

구자승의 정갈하고 엄격한 하이퍼 리얼리즘 정물화 <타자기가 있는 정물> <회고>, 오흥배의 정교한 묘사와 일부만을 화폭 가득 주인공으로 삼아 실재감과 상징성을 더 극대화 시킨 꽃그림들 연작, 이석주의 무심히 놓여 있는 생활잡화 소품들의 데페이즈망 조합을 빛의 극적 대비로 부각시켜낸 <일상> 연작, 닳고 말라 표면이 갈라진 비누덩이를 확대시켜 놓은 구본창의 <비누> 연작사진들은 고전적 기법이면서 명확히 부여된 실재감으로 팽팽한 긴장감마저 불러일으킨다.

이와 달리 사실적이되 회화적 뉘앙스를 살려 슬쩍 비틀어 놓은 작품들도 있다. 투명한 유리병들과 그들 뒤로 어른거리는 빛의 물결들을 유화같이 않게 정교히 묘사한 정보영의 <흩어지다>와 <창을 통해 보다>, 평면회화의 단면성 대신 렌티큘러 기법으로 바라보는 각도를 바꿈에 따라 중첩된 이미지들의 감춰진 깊이를 느껴보게 하는 배준성의 <화병> <꽃바구니> 작품들, 단아하게 놓인 백자항아리나 장롱 속에 들여놓은 이부자리 등을 마루판의 짜맞춤이나 장롱의 기하학적 구성효과로 화폭에 색다른 묘미를 담아낸 김덕용의 <내 마음의 풍경> 연작, 화병에 꽂힌 마른 들풀을 섬세한 붓질들을 미세하게 덧쌓아 단순간결한 배경과 함께 사실과는 다른 사실감을 보여주는 조영대의 ‘들꽃화병’ 연작들, 베일에 초점을 맞추고 그 사이로 들여다보이는 여인이나 사과 등의 주인공을 흐릿하게 해서 주객이 바뀌면서 신비감을 자아내는 남택운의 <그 여인들> <그 사과들>이 그런 예들이다.

이매리.절대공간 R-12.2010.C-type jet print.150x97cm

그런가 하면, 화려한 장식용 귀중품들이지만 언젠가는 사라질 보석장신구나 금속기물들을 설탕을 녹여 꼭 같이 만들고 실물처럼 착각을 불러일으키거나 녹고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 은유적 의미를 깔아놓은 구성연의 사진작업들, 삐딱하지만 끈질긴 존재의 비유로 한쪽으로 슬쩍 기울어진 정물대를 실물크기로 만들어낸 전강옥의 <기울어진 테이블> <테디베어>, 실존과 존재, 욕망, 시공간 등 삶의 초상을 하이힐과 오브제가 있는 구조물로 설치하고 이를 사진으로 담고 거기에 회화적 터치를 더하는 이매리의 <절대공간> 연작, 수없이 생성되고 스쳐가는 언론매체들의 텍스트를 필름에 꼴라주로 담고 이를 가방이나 신발모양으로 구겨 LED빛과 함께 시대의 기록물로 제시하는 정운학의 <기록된 풍경-정물> 연작 등은 사물로서 정물만이 아닌 무형의 존재와 성찰들까지를 담아내는 형상언어가 되고 있다.

김진화.선인장.2001.종이에혼합재.각58x71cm

아울러 여러 겹의 한지에 채색을 배이고 그 색감과 얼룩을 오려내어 사물들의 풍경을 묘사해낸 이미주의 <하하하> <향교세트>, 전통회화와 현대사회 풍경을 결합시켜 ‘음식산수’를 계속해 오면서 서로 다르 현실과 상상세계의 경계를 해체시킨 하루.K의 <그림 속 그림>들, 고사상태인 듯 생명이 남은 듯 고독하지만 굳건하게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자기존재를 잃지 않는 선인장들의 초상을 자유롭게 풀어헤친 필선들로 묘사한 김진화의 <선인장> 드로잉 연작, 골판지로 일상 사물들의 풍경을 재구성해낸 유벅의 <꽃> <정물> 연작, 일상의 사물과 삶의 공간을 상상세계로 변환시켜 착시적 풍경을 만들어내는 박상화의 미디어아트 영상작품 등 또한 독자적 방식으로 정물을 해석하고 삶을 비유해낸 작품들이다.

일상에 부지기로 존재하는 정물들은 그 자체로 견고한 자기세계들이 있다. 설령 단지 하나의 기물이거나 박제된 흔적일 뿐일지라도 작품소재로 불려 들여지면 보다 또 다른 의미의 확장된 세계로 생명감을 부여받게 된다. 고정된 사물 이상의 함축과 상징과 은유를 담은 조형언어의 표상이 되는 것이다. 정물이라 보는 여러 소재를 독자적인 방식들로 표현해낸 작품들의 성찬인 이 전시는 소재로서의 분류가 아닌 정물화 자체의 묘미와 표현의 다양성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는 그야말로 ‘정물화의 유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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